동일방직 똥물 사건: 47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여공들의 투쟁 이야기 [꼬꼬무 방직공장]

"똥을 먹고 살 순 없다!" 1978년 2월 21일, 인천 동일방직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외쳤던 이 절규는 4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173회에서 다룬 '꿈의 직장 속 수상한 비밀'은 동일방직 여공들의 처절한 인권 투쟁을 조명하며 잊혀졌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되살렸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방직공장 여공들의 처절했던 삶과 투쟁,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들의 싸움에 대해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1. 섬씨 40도 '지옥'에서 인간 기계로 살아가다

1970년대 한국 경제 성장의 그늘에는 수많은 여공들의 피와 땀이 스며있었습니다. 동일방직은 1955년 정헌 서정익 창업주가 귀속재산 동양방적공사를 불하받아 설립한 회사로, 국내 5위 규모의 방직회사였습니다. 1,300여 명의 노동자 중 1,200명 이상이 여성이었고, 이들의 평균 연령은 고작 18~22세, 학력은 대부분 중졸 이하였죠.

섬씨 40도에 달하는 작업장에서 날아다니는 솜먼지를 마시며, 이들은 하루 12~14시간씩 쉴 새 없이 일해야 했습니다. 식사 시간은 고작 30분, 그마저도 20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욕설을 들어야 했습니다. 졸음에 지친 여공들은 서로 꼬집어가며 잠을 쫓았고, 더위와 습기로 인한 발가락 무좀, 땀띠는 기본적인 직업병이었습니다.

"방직공장에서는 하루에 1분에 140보씩 걸어야 했어요. 그러니까 일반 사람의 3배 속도인 거죠. 방직공장 여공들은 그냥 '인간 기계'였습니다."

이들의 임금은 턱없이 낮았고, 병가를 신청하면 해고 위협을 받았습니다. 솜먼지로 인한 폐병에 걸려도 아무런 보상 없이 일터를 떠나야 했죠. 특히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자본과 성장이라는 단어 뒤에 가려진 참혹한 현실이었습니다.

2. 한국 최초의 여성 지부장과 민주노조의 탄생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회사 측의 지시를 받는 어용노조였고, 조합 간부직은 남성들이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들은 달랐습니다. 1966년부터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조화순 목사의 도움으로 권리의식을 자각하기 시작한 여공들은 1972년 5월, 마침내 한국 최초로 주길자 여성 지부장을 선출하며 민주노조를 세우는데 성공합니다.

새롭게 출범한 민주노조는 식사 시간 확보, 남녀 임금차별의 철폐, 환풍기 설치, 생리휴가 등 기본적인 노동권을 쟁취하며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다른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원풍모방, 반도상사, YH무역 등에서도 잇달아 민주노조가 세워지게 되었죠.

3. 처절한 알몸시위와 똥물 세례의 충격

노동자들의 민주화 바람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과 회사는 이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캠페인이 펼쳐졌고,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한 공작이 시작되었습니다.

1976년 7월, 회사 측은 노조지부장과 총무를 경찰에 연행시킨 뒤 어용노조 파를 중심으로 불법 대의원대회를 개최했습니다. 기숙사 출입문에 대못을 박아 여공들의 항의를 봉쇄한 상태였지만, 분개한 노동자들은 기숙사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거나 문을 부수고 나와 파업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농성 사흘째인 7월 25일, 경찰의 강제 해산이 시작되자 여성들은 최후의 저항으로 팬티와 브라자만 남긴 채 옷을 벗어던지는 '알몸시위'를 감행했습니다. "벗고 있는 여자 몸에는 경찰도 손을 못 댄다"는 말에 수치심을 버리고 단체로 반나체 상태가 된 것입니다.

동일방직 사건 당시 사진
1970년대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 현장 [출처: 한겨레]

하지만 경찰은 끝내 72명을 연행했고, 이 소식은 어느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인물을 통해 민주화 세력에게 널리 퍼져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현장 조합원들의 단결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978년 2월 21일, 역사에 길이 남을 '똥물 사건'이 발생합니다. 노조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회사 측이 사주한 남성들이 화장실에서 퍼온 인분을 뿌린 것입니다. 5~6명의 남자들은 방화수통에 담긴 똥을 여성들의 얼굴과 몸에 바르고, 입에까지 밀어넣었습니다.

"이 빨갱이 년들아!"라며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똥을 퍼서 닥치는 대로 여성들의 얼굴과 몸에 뿌리고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그들은 똥을 젖가슴에 집어넣고 입에까지 밀어 넣었습니다.

경찰은 이 광경을 보고도 제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에게 "야! 이 썅년아! 가만 있어! 이따가 말릴 거야!"라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똥물을 뒤집어쓴 여성 노동자들은 바로 병원에도 가지 못한 채 퇴근해야 했고, 다음 날 출근했을 때는 124명이 집단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4. 블랙리스트와 끝나지 않은 투쟁

회사 측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고된 여성 노동자들의 명단은 섬유노조 본조를 통해 전국의 공장에 '블랙리스트'로 배포되어 어디에서도 취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해고자 명단에는 부서, 생년월일, 본적까지 상세히 기재되었고, 124명의 여성들은 사실상 사회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들의 복직투쟁은 기약 없이 이어졌고, 가난과 냉대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20대 초반이었던 여성들은 40대, 50대, 60대가 될 때까지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2001년, 드디어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납니다. 중앙정보부 경기도지부 노사문제 담당관의 양심선언을 통해 동일방직 노조탄압의 모든 과정이 중앙정보부의 기획이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에 따라 2004년 법원은 해고자 전원에 대한 복직판결을 내렸고, 2011년에는 국가가 해고자들에게 1인당 2천만 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이 이루어졌습니다.

5. SBS '꼬꼬무'가 조명한 역사의 한 페이지

2025년 5월 1일 방영된 SBS '꼬꼬무' 173회는 이 잊혀진 역사를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꿈의 직장 속 수상한 비밀'이라는 주제로 방영된 이 회차는 배우 임세미가 리스너로 출연해 피해자 증언을 들으며 오열하는 모습이 담겨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방송은 방직공장의 열악한 노동환경부터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설립, 처절한 알몸시위와 똥물 사건, 그리고 47년째 이어지고 있는 명예회복 투쟁까지 상세히 다루어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꼬꼬무는 특히 이 사건이 단순한 노사 분규가 아닌, 정부와 정보기관이 개입한 조직적인 인권 탄압이었음을 명확히 짚어내며 역사적 의의를 재평가했습니다. 또한 47년이 지난 지금도 생존 여공들이 '자발적 퇴사'가 아닌 '강제 해고와 탄압'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음을 조명했습니다.

6. 동일방직 사건의 역사적 의의

동일방직 사건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여성 노동운동과 민주노조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몇 가지 중요한 의의를 살펴보겠습니다.

6.1 여성 노동자의 주체적 투쟁

동일방직 투쟁은 한국 최초로 여성 지부장을 선출하고, 남성 중심의 노조 구조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주체적으로 나섰던 첫 대규모 운동이었죠.

특히 남성 관리자와 정부 기관의 탄압에 맞서 공포와 수치심을 이겨내며 처절하게 싸웠던 모습은 이후 한국 여성 노동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6.2 노동기본권 투쟁의 시작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단순히 임금 인상만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일터에서의 인간다운 삶과 기본권을 주장했습니다. 식사 시간 확보, 환풍기 설치, 생리휴가 등 오늘날 당연시되는 노동권이 이 투쟁을 통해 쟁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투쟁은 노동 환경 개선뿐 아니라 노동자의 존엄성을 지키는 싸움이었고, 한국 사회에 노동인권 개념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6.3 민주화 운동과의 연대

동일방직 사건은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교계 노동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노동운동이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198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 사건을 계기로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의 노동운동 지지가 확산되었고, 민주화 운동의 외연이 확장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7. 아직도 끝나지 않은 투쟁

47년이 흐른 지금도 동일방직 사건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현재진행형입니다. 2023년에는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노동연대, 여성단체 등도 사건 재조명을 위한 공동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생존 여공들은 여전히 사건의 진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동일방직 사건은 단순한 과거가 아닌, 평생을 따라다닌 트라우마이자 아직 완결되지 않은 정의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냥 인간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걸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게 그렇게 큰 죄였나요?"

8. 현대 사회에 주는 메시지

동일방직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지금의 노동환경은 얼마나 개선되었을까요? 노동자의 권리와 인권은 충분히 보장되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까요?

이 사건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인권과 존엄성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는 점입니다. 경제 발전과 성장에 가려진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진정한 발전이 가능함을 상기시킵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여성 노동자 차별, 비정규직 문제, 노조 탄압 등 노동 현장의 불평등 구조를 성찰하게 합니다. 47년 전의 사건이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9.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의 중요성

이번 SBS '꼬꼬무' 방송은 잊혀가던 역사를 대중에게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교훈을 남기는 작업입니다.

동일방직 사건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정확히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역사가 주는 교훈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10. 나가며: 잊혀진 여공들에게 보내는 존경의 마음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이들의 용기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노동권과 인권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47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투쟁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들은 단지 '공순이'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끈 용감한 주인공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역사 속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기를 바랍니다.

꼬꼬무가 조명한 동일방직 똥물 사건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을지 모를 인권 침해와 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 질문에 답할 차례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똥을 먹고 살 순 없다!" - 이 외침이 47년이 지난 지금도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향한 보편적인 열망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